언어능력의 한계, 언어의 한계, 사고의 한계

in #kr-philosophy8 years ago

pg.jpg
언어가 사고의 틀을 제한한다는 가설이 있다. 이 가설은 제2언어 학습이 유리한 시기가 있다는 이론과 맞물려 학부모들이 경쟁적으로 자식들에게 제2언어 교육을 강요하도록 하기도 한다. 사고의 폭을 넓히기 위해 학습이 유리한 기간에 제2언어를 습득시키겠다는 것이다. 제2언어 능력이 있는 아동들이 정신적으로 발달했다는 연구들도 있는만큼 학부모들이 이해되지 않는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언어는 인지의 틀을 제공하며, 언어적 표현의 틀을 제공할 뿐이지 사고를 제한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선 수를 모른다고 많고 적음에 대한 사고 자체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매듭법을 모르는 사람은 산악인, 뱃사람이 매듭 짓는 법을 구분하여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매듭 짓는 법을 지켜보게 한 후 표현하게 한다면 '매듭 짓는 사람'이라 표현하지, 그 매듭의 용도를 알지도, 그 매듭의 이름을 알지도 못 한다. 하지만 뱃사람의 매듭, 산악인의 매듭을 나란히 두고 둘을 구분하라고 하면 둘을 구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매듭의 형태, 용도, 이름에 대해 학습시킨다면 이전에 보았던 매듭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그들의 직업을 유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Sorry'와 '미안'은 용법이 완전히 겹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안'이라는 표현만 알고 살았던 한국인도 'Sorry'의 용법에 대해 배우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평생 언어적인 표현이 가능한 수단이 없이 살았던 사람도 표현이 가능한 수단을 학습한 이후에, 학습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표현할 수 있다. 언어적 능력이 없다는게 사고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래서 언어는 사고의 틀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제2언어 능력이 있는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들에서는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사실 굉장히 간단하다. 제2언어 능력이 있다는건, 더 많은 환경에 노출되었고 더 많은 경험을 의미한다.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아동이 그렇지 않은 아동에 비해 발달 했다는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특히나 제2언어 능력과 아동의 사고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언어능력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그렇다면 언어적 환경에 노출이 많은 아동이 언어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왜 놀라운가? 내가 보기에는 "하루에 축구만 1시간 한 아동에 비해 하루에 축구 1시간, 농구 1시간 한 아동이 축구를 더 잘 하더라"와 큰 차이 없게 느껴진다.

생각을 언어로 하느냐, 아니냐는 오랜 논란이 되는 주제다. 언어능력이 없는 사람도 생각할 능력은 있지만, 이와 별개로 언어를 이미 습득한 사람의 모든 인지와 경험은 언어를 토대로 일어났고, 따라서 생각 또한 언어를 토대로 하는게 아니냐는 가설도 존재한다. 내 주관적인 경험은 그 가설에도 반대한다. 때로는 이미 생각이 정리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그 생각을 언어로 옮기는 일이 어렵다. 머릿속에서는 명쾌한 생각이 말 혹은 글로는 명쾌하게 표현되지 못 한다. 나는 언어의 형태로 생각을 하고 생각을 그저 받아적듯 표현하는게 아니라, 생각을 언어로 번역하듯 표현한다. 물론 내 주관적인 경험이란 그 어떠한 신뢰도도 갖지 못 하고, 혹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면 제대로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것이라기도 하지만 말이다.

언어능력의 한계인지, 언어의 한계인지, 사고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내 머릿속에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머릿속에서는 명쾌하게 모든게 해결된 것 같은 순간임에도 나는 도저히 그 생각을 옮길 표현을 찾아내지 못할 때가 있다. 생각이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도 있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서 시작했던 생각이, 무언가에 부딪쳐 길을 잃기도 한다. 그리고 그 좋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표현할 수 없다. 나는 그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항상 손이 닿는 곳에 메모를 위한 도구를 두고 생각이 떠오른 즉시 이를 언어로 번역하여 기록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항상 실패한다. 과연 이는 머릿속에서 흘러간 생각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언어의 한계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 사고의 한계로 순간적인 번득임을 정리하지 못 했을 뿐일까?

글을 마무리하려다가 문득 가끔씩 나에게 찾아오는 자극이 생각났다. 충동, 느낌, 감정 중 어떤 것도 그 자극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꼭 표현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나는 "부정적인 자극" 내지는 "육감"이라고 표현한다. 부정적인 자극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불쾌함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오기 때문이고, 무언가를 피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긍정적이라 표현하기는 어려운 자극 아닌가? 하지만 육감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문득 그 자극을 느꼈다. 그 길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 자극은 결코 무시할만큼 약하지 않기에 나는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며 그 자극의 원인을 생각해보니, 내 지갑에는 현금이 없었다. 그리고 그 길로 건너면 ATM이 한동안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현금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자극이지만 분명 하나의 사고이긴 한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우연이었을까? 공황발작이 찾아오듯 부정적인 자극이 찾아왔는데, 우연히 그것이 잘 맞아떨어진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황발작조차도 뚜렷하게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유는 있지 않은가?

스포츠 선수들이 엄청난 움직임을 보여주고, 그게 극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때 인터뷰어가 어떻게 그럴 생각을 했냐고 묻곤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냥."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인터뷰를 보고 그 선수의 동물적인 감각이 대단하다고 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 선수의 뇌가 의식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고를 순간적으로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을 설명할 언어적 능력이 없는 선수들은 "그냥."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복잡한 사고를.

확실히, 언어능력의 한계, 언어의 한계로 그 사고를 명확하게 남에게 전달하는게 어려울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그 사고가 불가능하며, 존재하지 않는건 아닌가보다.

Sort:  

저는 언어가 사고의 폭을 제한한다고 생각해요.
단어는 어떤 뜻이나 개념에 매여있을 수 밖에 없고, 경계가 없는 생각이 떠오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밖으로 꺼내려면 결국 언어라는 장벽을 만나게 되니, 유리천장처럼 표현될 때는 원래 생각에서 어느정도 재단되는 것 같아요.

의식적인 사고가 전부인건 아니니까요.

저도 언어가 사고의 폭을 제한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는, 우리는 언어로 생각을 표현할 때 사고의 폭을 제한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물이 각 나라마다 다른 단어와 표현들일 것이구요. 각 나라의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것들이 그 나라만의 독특한 단어로서 나타나는 거죠.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한'이라는 단어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느낌이 있겠구요.
이런 느낌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건 참 어렵죠.

정리하자면
어떤 현상 자체는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 자체의 의미는 언어라는 형식에 제한되어서 일부만 표현된다.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의미를 100%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물론 언어적 표현뿐만 아니라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표현 모두 공통)

죄송합니다.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이것도 언어적 표현의 한계일까요..? 아니면 그냥 저의 한계일까요;;;;

제 경우엔 글쓰기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머리 속으로는 정리가 촥 되고 결론도 나왔는데, 막상 글로 쓰면 제가 생각한 바의 절반도 전달을 못 시키네요 ㅠㅠ

너무 자책하지 않고 끊임 없이 노력하는 방법 밖에 없겠죠. 누구나 다 그럴거에요.

Philosophers devoted reader KM LEE , this is the only text I understand , but I like the picture and the idea .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지만, 생각은 결국 행동으로 표출되지 싶습니다. 그런데 말이나 글은 행동이나 태도와는 차이가 있는 경우도 많지요.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해 지고자 하는 욕망의 귀결이 말과 글이지 싶습니다.

그 재밌는 생각을 글로 표현한게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고..
영화화한게 컨택트 였죠..

전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고 봅니다.
영어의 경우 주어/동사 로 주체/행위가 먼저나오게 되니 좀 목적 지향적인 경향이 크죠. 그래서 논리적이 되고.. 등등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일련의 생각이 있습니다.

몽골어권(한국/일본)의 경우 동사가 제일 뒤에 붙다보니 존칭등이 발달하게 되고.. 위계질서 등이 발달하게 된게 아닐까 싶어요...

제 개인 경험으로 들면, 개발언어.. 혹은 영어로만 사고할때는 그 언어로 사고 하게 됩니다. .. 그 밖의 것은 그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이죠. 아니면.. 주저리 주저리 군더더기가 붙게 되죠. 그걸 간결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있으면.. .. 한마디로 끝나는 건데 말이죠.

그런 예가 말씀하신 sorry도 있는 것 같습니다. 번역은 미안해 입니다만... 상황과 문맥과 이런게 미안해 하고는 좀 다르죠.... 미묘하게...

인지의 틀, 표현의 틀이 다르기에 발달의 방향이 다를 수는 있죠. 그렇게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발달하며 언어의 차이 또한 커졌을 것이구요. 하지만 그것이 사고의 한계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에 대해 말씀하신 것도 표현의 틀이 다르기에, 표현에 유리한 언어는 존재할 수 있지만 사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건 아니겠죠.

역시..
리스팀합니당

성격이론에서 말하는 '직관', .통찰을 잘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 에니어그램이나 MBTI 받아보셨나요? ㅎㅎ 재미있습니다.

언어--농구, 축구를 아우르는 넒이를 얻게된다는 것에 완전 동의합니다. 저는 힘들지만요,

언어로 보자면 한국말로 영어의 have pp시제를 설명할 수 없듯이 한 언어를 습득하는것은 한 문화에 들어가는 일이죠.. 하지만,
통역학?에서볼때 모 언어를 충분히 익힌 후에야 2차 언어를 익힐 수 있는데 , 어릴 때 영어공부는 모 언어의 부족으로 언어장애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합니다. 둘다 어설플수 있다눙 -^ㅡㅡ^

MBTI는 여러번 받아보았지만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영어의 시제를 한글로 설명하는게 어렵지만 이에 대한 사고가 없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에 대한 사고 자체가 발달하지 않았다면 영어 습득 이후에도, 개념을 이해하는게 불가능하겠지요. 말씀처럼 문화가 다를 뿐이지 사고 자체가 완전히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 현상의 원인이 제2언어 습득 자체가 문제인지, 제2언어 교육과정에서 있었던 다양한 일들에 의한 영향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책이랑 친하게 못지내온 탓에 스티밋을 함에 한계를 많이 느끼는 요즘에야 비로서 독서란 것을 조금 하고 있습니다ㅜㅜ 언어능력의 바운더리를 넓혀보려구요ㅎㅎ

좋은 책을 많이 만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아이가 어렸을때 아이뇌는 말랑한 천재라는 발상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시도한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생각도 바뀌었지만...
인간의 언어로 정확히 표현해 낼수 없는 것들 그런 상황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언어의 위대함과 더불어 불완전성을 가끔 느끼기도 합니다

킴리님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jsj1215 께서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